Friday, November 22, 2013

"러시아에서 본 한국전쟁과 평화"

(레오니드 페트로프 호주국립대학교) 2013년 7월 27일 세계는 한반도에서의 전쟁행위들을 멈추게 했던 휴전협정 60주년을 기념했다. 한국에서의 휴전이라는 성격상 결론을 내리기 힘든 사건은 그것이 2차대전이 종식된지 불과 5년 만에 동북아시아의 심장부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설명과 함께 서로 대비되는 관점으로 이르게 됐다.

두 개의 경쟁적인 정치체제-북쪽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남쪽의 대한민국- 사이에서 통일을 위한 충돌로 시작된 전쟁은 실은 일부 작가들에 의해 3차대전의 대리전으로도 묘사되었던 심각한 국제적인 분쟁이었다.

16개의 국가들은 본질적으로 이념간의 충돌이었던 이 전쟁에서 한 편이 된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한국으로 몰려왔고 본질적으로 이념간의 대결이었던 이 전쟁에는 또 다른 편이 있었다. 미국, 중국 그리고 소련의 참전은 이 전쟁을 더 큰 냉전 대결의 촛점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유엔과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마지못해 휴전에 서명해 놓은 것도 또 다른 방법을 통해 자기들 편 (그리고 그 대리인들)에 참가해 오로지 전쟁만을 계속하기 위한 견고한 의지로 반영되었다. 사상적으로 뚝 떨어진 두 개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모델-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에 있는 한국에서 평화가 회복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최고조에 달했던 공산권 붕괴 이후 20여년이 더 흘러갔다. 새로운 러시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냉전패배라는 힘들고 큰 충격적 경험을 통과하여 갔다. 신속했지만 불완전한 민주화와 경제적 고통 그리고 오일달러라는 횡재는 공산당과 KGB 관료주의자들의 크렘린으로의 복귀와 최근의 국가적 흐름을 대하는 태도에서 거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오늘날의 러시아에서는 제국적 근성의 회복과 깊이 자리한 맹목적 애국주의와 군국주의는 자연스럽게 반서방적 정서의 회복과 냉전에 우호적인 수사(修辭)를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도 있지만 일관된 것은 한국에서의 사무치는 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공식적이고 대중적인 접근이다. 그들은 점점 더 모스크바, 베이징, 평양이 함께 외세 침략자에 대항해 싸웠다는 1950년대의 판에 박힌 문구를 상기시키고 있다.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불경스럽게 되어가고 있고 그와 동시에 민주적 제도의 중요성은 늘상 조롱당하고 있다. 2013년에 러시아 내각은 고교과정에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들기 위한 푸틴 대통령의 “역사의 해설은 만고불변적이고 공식적으로 승인되어야 한다”는 구상을 승인했다. 무엇이 러시아의 “공식적이고 승인된” 한국전 역사의 견해인가? 그것은 러시아와 해외의 독립된 학자들의 비공식적 견해와 얼마나 다를까? 이런 변화는 모스크바의 서울과 워싱턴과의 장기간에 걸친 관계에 갈등을 일으킬 것인가? 이것은 남북한 충돌에 있어서의 소련의 역할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것인가?

이 논문은 한국에서의 전쟁과 평화라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정치 ․ 역사학자들의 현재의 입장을 분석하였다. 일부 러시아의 한국학 전문가들은 매우 새로운 전망들을 하고 있고 한국문제에 있어서 비당파적 접근에 기초한 분별력있는 해법을 제안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의도적으로 정치적, 반미적, 친북한적인 입장에서의 연구를 여전히 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주장은 묵은 원한을 악화시킬 수도 있고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그리고 “누가 한국전쟁에서 이겼는가?”와 같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여전히 새로운 지역 외교적이고 학술적인 분쟁들에 불꽃을 튀게 할 수도 있다. 그러한 주제들은 러시아인들의 블로그 공간에서 열렬한 논쟁거리로 남아있고 역사 다시 쓰기 프로젝트로 소비에트 시대의 호전적 애국주의라는 약물의 주입을 통해서 “역사적 기술을 바로잡는” 과정에 기꺼이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신애국주의자들에 의해 쉽게 이용되고 있다.

이 연구는 호주 연구위원회가 후원하고 Tessa Morris-Suzuki(호주국립대) 교수가 선도하는 “동북아시아와 한국전쟁 : 당대의 지역구조 속에서 냉전과 열전의 유산” 이라는 연속된 합작 프로젝트의 일부분이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의 이웃 국가들 : 중국, 일본, 극동 러시아, 대만, 그리고 몽고-을 통해서 전쟁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사상적 영향을 최초로 이해하기 위한 연구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전쟁의 심오한 영향의 분석을 통하여, 이 프로젝트는 이 지역에서의 냉전의 이해를 더 심화시키고 한반도에서의 계속되는 위기를 극복하려는 움직임들을 위한 역사적인 구조를 제공할 것이다.

두 분야로 나뉘어진 이 논문은 처음으로 한국에서 여전히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와 전쟁을 정식으로 끝내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당대의 러시아 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할 것이다. 해제된 비밀문서와 공표된 군의 인사적인 통계와 폐기되었거나 또는 생포된 적의 정보제공자들부터 얻은 보고들은 러시아와 서구의 사료들로 편찬되어 쭉 늘어놓게 될 것이며 그들 사이의 모순점들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두 번 째 분야는, 뒤집어 말하자면, 한국전쟁에 관한 새로운 러시아의 신화를 통해서 구 소련의 고정관념을 설계할 수도 있는, 겉으로 나타나는 대중적 견해로부터 발생하는 가능한 피해를 예고할 것이다. 러시아의 영화, 미디어와 도서관 자료들에 묘사된 한국전쟁은 이 충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또는 그렇지 않다면)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우리의 분별력을 증가시킬 것이다.

이 논문의 출처들은 한국에서 휴전 60주년을 기념하여 최근에 발행된 대중매체의 범위 내에서 선별한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이것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노병들의 증언들과 회고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다른 독립국가연합(CIS) 출신의 당대의 전문가들에 의한 분석작업이다. 새롭게 정형화되고 공식화된 역사교과서와 관련된 현재의 논쟁 역시 러시아와 그 이웃나라들과의 국제관계를 위한 장래의 청구서의 모형을 만들기 위한 의도로 여기에서 이용된다. 이 자료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주류 러시아인들의 사고방식을 개조하기 위해 이용되어져 왔는데, 2000년 푸틴 행정부의 출범 이래로 거대한 방향전환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레오니드 페트로프 (호주국립대학교 초빙연구원)
https://www.facebook.com/events/197763273743613

Friday, August 30, 2013

김정은의 북한

 (글: Leonid Petrov / 번역: Liz Kim 김혜선)

북한에는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의 시대가 열렸고 일년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의 아버지 김정일은 유언장을 통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 김정은에게 남한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6자 회담을 재개하여 북한의 원자력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전하였다. 후계자로서의 그의 의무만을  감안해 본다면, 작년 한 해동안 후계자 김정은은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실패한 후계자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발전되고 있는 북한의 최근 모습들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김정은은23.5백만 북한주민들에게 ‘다시한번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맬 것’을 당부하며 ‘번영의 시대’로 약속된  2012년 그의 시대를 열었다. 그것을 목표로 북한정부는 십만세대를 위한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였고 중국산 수입물품들로 상점들을 채웠으며 궤도에 위성을 발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새로운 경제 조치로 외국과의 무역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예술과 엔터테인먼트를 위하여서는 새롭게 여성«은하수» 그리고 «모란봉» 전자밴드들이 구성되었고 롤러 코스터가 있는 새로운 놀이동산과  돌고래수족관등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쇼 케이스인 평양을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짧기만한 신혼여행의 단꿈처럼, 번영의 시대를 향해 달려가던 혼동의 정책들은  북한정부의 도발적인 로켓발사의 원인으로 미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이의 식량원조협의와 정상화 합의가 방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사슬들로 그 모습들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남한을 비방하는 캠패인의 광기는 서울의 보수파들이 선거에서 성공하게 되자  그 강도가 높아졌고 몇 몇의 북한의 보수파 고위급관리들이 제거되기도 하였다. 

김정은 정권에 불만이 있던 몇몇의 고위급 장교들이 2012 년 11 월 김정은암살을 시도하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만일 이러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김정은은 자신의 정권을 지지하는 충성 강경파와 더 단단히 손을 잡아야만 했을 것이며 이러한 정치적 체스게임에서  ICBM 발사와 세 번째 핵 실험 등 북한의 최근 공격적인 행동으로 자신들의 우세함을 보여야만 했을 것이다.

잠재되어 있던 내부적 갈등에 관계없이, 북한은 장거리 로켓발사 장비의 개발과  3G 휴대 전화 네트워크, 그리고 빠르게 개선된 물리적 인프라를 갖춘 자체 핵 국가를 선포하며 2013 년을 시작하였다.

평양은 점차적으로 다국적 기업의 CEO 및 스포츠 유명 인사들의 메카로 전환되었다. 우라늄, 희토류 금속, 고급 석탄, 금등이 매장되어 있는 북한의 광산은 국내의 수요와 수출을 위한 다양한 천연자원을 자랑하며 매우 중요한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수만의 북한주민들은 비무장지대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개성공단에서 남한과의 공동 프로젝트로 하이테크와 소비재를 생산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2013년 1월 22일 금지되었던 평화에 위협이 되는 북한의 로켓발사 재가동을 제지하기 위해 № 2087명령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국제사회가 평양의 금지된 장난을 처벌하고 제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베이징과 모스크바조차도 북한의 핵 및 로켓의 기술개발을 동결하라는 국제사회의 강도높은 요구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김정은은 2월 세번째로 핵 폭발을 명령하면서 국제사회의 요구에 맞대응 하였다. 그러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2013년 3월 7일 강도를 높인 № 2094 를 발표하였다. 또한 김정은은 1953 년 정전 협정을 파괴하는 전쟁선포를 미국과 남한에 선포하였다.

한미 공동군사 훈련인 Foal Eagle과 Key Resolve 그리고 Ulchi Freedom Guardian훈련은 악화로 치닷고 있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의 로켓들은 한국을 포함하여 미국기지가 있는 오키나와, 괌 그리고 하와이 뿐만 아니고 미국 본토까지도 조준되어 발사될 준비가 되었다. 평양에 있는 외국공관들은 4월 10일 이후에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개성공단에서 일하던 모든 북한 근로자들은 남북간 협력의 마지막 생존영역인 개성공단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국제적  긴장을 높여가고 있는 북한의 악명높은 이러한 행동들은 결국은 북한 내부의 현재의 위기들에 의거한 것 이기도하다.  지도자로서 아직은 너무 젊은 김정은은 굶주림의 계절인 봄을 극복하고 우상화된 김일성의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사나운 반미감정을 갖게 하여 경제로부터의 관심을 따돌리고 최고 사령관인 자신에게 주민들의 관심을 통합하려는 강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번영의 시대’에서 ‘적대적 제국주의의 태도’ 와 ‘임박한 전쟁’의 관점으로 북한의 주민들은 돌아서 있다. 후계자로서 실패한 자신의 실수와 보이지 않는 경쟁세력을 극복하려는게 그 목적이라면 전쟁의 긴장감으로 이미 충분히 그 목표는 달성되었다. 전쟁의 긴장감은 김정은을 너무 젊은 지도자에서 이제는 최고의 사령관으로 그의 입지를 충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김정은으로의 정권계승은 북한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하는 실질적인 변화를 피할 수 있다는 이론에 그 힘이 더 해지고 있다. 더욱이 만일 소련에서 일어났었던 정치, 경제개혁인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이나 글라 노스트가 북한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김정은의 리더쉽은 더 이상은 통제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세뇌를 통한 북한의 엘리트 집단들은 안정을 유지하려는 분위기를 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줍잖은 경제개혁이나 정치적 변화의 압력만으로는 북한의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북한의 정권계승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로 이어져 왔다.  그 이론만으로 김정은은 김일성왕조를 후계받은 완벽한 후계자인 셈이다. 그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군으로  구성된 조선 노동당의 친애하는 지도자이며 최고 사령관으로 숭배되고 있다. 일반인들의 사회 경제적 개선과 국가 안보에 거는 기대는 안정을 원하는 엘리트집단들을 위해 혁명이 없는 안정된 상태가 유지 될 것이다. 아버지의 유언대로라면 젊은 지도자 김정은은 최고 사령관으로서 숭배를 받으며 아주 오랫동안 그의 정권을 계속 유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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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was published as "Domestic reasons behind the crisis" in SPI Dossier, Institute for International Political Studies, 9 April 2013. See the full text here...

Wednesday, August 21, 2013

NORTH KOREA: 북한 사람들 이야기

Proudly brought to you by the Australian Research Council, the Toyota Foundation, the North Korean Transnational Supporting Association, and the UTS Cosmopolitan Civil Societies Research Centre.

2013년 8월 27일 6시30분
장소: 시드니 한인회, 82 BRIGHTON AVE. CROYDON PARK, SYDNEY

호주를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북한 주민을 비롯한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보다는 주로  북핵문제를 비롯한 안보문제에 촛점이 제한되어 왔습니다. 북한 사람보다 북한을 더 잘 많이 알고 있다고 알려진 이화여대 북한학과 김석향 교수와 호주에서 북한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자들을 모시고 전혀 변화하지 않을 것 같은 북한 사회에 일고 있는 변화에 대해서 들어보려고 합니다. 이번 행사는 북한 주민의 인권의식, 남녀 관계의 변화, 유행, 소비행태  등을 비롯하여 북한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촛점을 맞춰보았습니다. 보다 다각적인 시각에서 북한문제를 바라다보며, 북한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모색하기 위해서 기획된 행사입니다. 연구자들과  호주 교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북한사회와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폭 넓은 문제의식과 관심의 공유를 기대해봅니다.

주최:  시드니 한인회 (02-9798-8800) / 재호북한이주민후원회  
후원: 정관장, 옹기김치 & 씨니건강  
강사: 김석향 교수(이화여대 북한학과) 
        레오니드 페드로브 박사 (호주국립대)
        정경자 박사 (UTS 사회학과) 

이번 행사는 호주한인회가 주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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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April 29, 2013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평화


/ Dr. Leonid Petrov (호죽국립대학교) 번역/정리: 김혜선기자

해마다 동북아시아에서의 봄은 남한과 북한사이의 긴장감과 함께 찾아온다. 분쟁해역지역에서의 군인들의 잦은 소규모 충돌과 비무장지대(DMZ)그리고 정규적인 군사훈련과 전쟁에 관한 엄포들은 가히 소설수준이다. 봄과 함께 시작되는 전쟁의 계절에서 올해,우리는 통제를 벗어나 남북한의 전면전으로 까지도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전례없던 한반도의 남북간 전쟁의 긴장을 목격하고 있다.

한반도의 통합을 위한 전쟁으로 1950년 6월에 발발하였던 한국전쟁은 미국을 선두로 하는 열 여섯개국가들의 UN연합군들과 북한과 중국의 연합군이 충돌하였던 국제 전쟁이었다. 기적적으로 그 전쟁은 핵무기를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세계 제3차대전까지는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확고하지 않았던 불안정한 휴정협정의 결과로 화해할 수 없는 두개의 정권을 만들었다.서울과 평양,두 정권은 한반도의 선두 통합을 위한, 전쟁도 불사하지 않을 지속적인 힘겨루기를 계속해 오고 있다.

1970년대 초반까지 남한과 북한은 전쟁 후의 비교되지 못할 정도의 상반된 경제발전의 결과를 가져왔고 타협과 화해를 위한 정치적대화는 없었다.그러나 전쟁의 결과로 인해  북쪽과 남쪽에 흩어져 살고 있던 이산가족들의 만남이 국제적십자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1974년,북한은 평화통일을 위한 평화협정제안을 가지고 워싱턴에 접근해왔다. 그리고 남북한 평화통일을 위한 종합적인 계획으로 서울에도 접근하였다.그러나 서로다른 이데올로기사상과 상반된 경제력의 결과는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복원하고 냉전상태를 종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남한과 미국은DMZ남쪽의 서해와 동해의 해상에서 일년에 두번씩 군사합동훈련을 시작하였다.  이 훈련 기간동안 남한과 미군연합군은 가상 핵 공격에 대비한 새로운 무기와 새로운 전술등을 선보였다.북한은 주위공산국가들의 붕괴이후 자체적인 핵 미사일 프로그램을 개발했다.하지만 어떻든 이러한 서로다른 준비들은 계속되는 한반도에서의 딜레마를 해결하는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통일의 기회는 서울과 평양이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영원한 적군으로서 다른한편의  붕괴만을 기다리는 수 밖에는 없는것 처럼 보였다.

북한에 대한 남한의 햇볕 정책(1998년-2007년)이 실행되었던 시기조차에도 남북한사이의 불신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남한과 미국연합군의 육,해, 공을 톻한  전반적인 연례적 정규군사훈련이 계속되는 동안 북한은 핵 미사일개발과  무기고 구축을 계속해왔다. 그러한 결과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미국동맹국들과 북한의 사이는 점점 더 부정적인 관계로 내딛게 되었다.  북한은 또한 호주를 포함한 미국동맹국들과의 관계 실패와 자신들의 악화된 경제상황의 결과들로 언제나 미국에 그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한반도의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상태는 이미 동북 아시아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한국과 미국 그리고 김정은의  '전쟁의 상태 "선포는 냉전시대이래로 변함없이 동북아시아에 자리잡고 있는 한반도의 치료되지 못할 고질병에 대해 다시한번 세계를 상기시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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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드 페드로브는 호주국립대학교의 아시아 태평양대학의 한국학 초빙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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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was published in The Australian Financial Review (03/04/2013) under the title "Titanic struggle for unification keeps the two Koreas a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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