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28, 2012

모스크바는 김정은을 지지한다?

(글/ Dr. Leonid Petrov; 번역/정리: 김혜선 기자)

러시아는 에너지파이프와 전기 고압 전선망을 통해 분단된 한국을 연결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와 북한과의 경제관계는 오래 전 냉전시대의 그들 관계로 돌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48년 당시 소련의 스탈린은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립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북한 금고 고갈, 경제상태는 더 이상 나쁠 수가 없었다


그 이듬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2퍼센트의 대출이자로 2억 1천 2백만 소련 루블을 거둬들이러 모스크바로 여행했다. 이 돈 중 일부는 북한의 중앙개혁경제를 구축하기 위해 할당됐지만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반도를 통합하기 위한 남한과의 전쟁비용으로 사용됐다.

한국전쟁 후 소련은 북한의 도시와 산업 인프라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심지어 중국과의 이념적 분할이 있는 동안인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모스크바는 베이징과의 대결에서 평양을 측근에 두기 위해 노력했다.

극동 공산주의의 보루로 소련은 한반도에서 미군과 직접 대결을 했고 그러는 동안 북한은 중국과 소련, 양쪽의 주머니에서 돈을 짜내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 철의 장막은 무너졌고 모스크바의 민주화 영향은 서울을 인정했으며 평양에는 부채 상환을 요구했다.

그 시점은 북한에 있어 경제적으로 최고로 악화된 상태였다. 돈은 비생산적인 분야, 즉 군대의 사상 캠페인과 김씨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치스러운 기념물 등에 낭비되고 있었다.

북한의 금고는 고갈됐고 경제상태는 더 이상 나쁠 수가 없었다. 북한은 러시아에 부채상환으로 오이절임, 담배 및 인삼제품 등 가난한 수출상품의 목록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죽음과 1995년 자연재해의 시작으로 산업과 농업은 최악의 상태가 됐고 3년동안의 기아로 3백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남한의 ‘햇볕정책’과 기타 이웃나라들로부터의 인도적 원조는 북한을 ‘힘겨운 3월’에 겨우 살아 남도록 허용했다.

러시아, 북한 부채 90% 할인에 합의

북한의 그러한 ‘고난의 행군’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징후를 보이기도 했다. 이때 모스크바는 미화 80억불의 부채상환을 다시 요구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번이나 러시아 푸틴 대통령을 방문했다. 다른 양자간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부채문제를 다른 문제들로 대처하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기도 했다.

작년 8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러시아 매드베대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남북한 모두에 러시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도록 하는 제안에 합의했다. 동시에 북한과 러시아는 양국간의 경제협력을 위한 프로토콜을 체결했다. 그러나 국제적인 관점을 말해주는 옵저버들은 즉각적으로 그 프로젝트에 강한 의문을 갖게 됐다. 그들의 관측으로 그 프로젝트는 남북한을 계속적인 충돌관계에 남아 있게 만들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러시아는 10년동안 이웃국가에 천연자원인 석유를 판매해 수백억불의 오일 대박을 맞게 됐다. 미화 1백 10억불의 부채를 러시아에 상환하라는 요구를 경제적으로 메마른 북한에 기대한다는 것조차도 비현실적이다.

지난 주 러시아 정부는 고집스러운 동맹국인 북한에 부채의 90퍼센트를 할인 해 주는 것에 합의했다. 나머지 미화 11억불은 러시아와 북한의 교육, 의료 및 에너지 분야의 공동 프로젝트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아시아에 냉전 정책 돌이키려는 러시아


그러한 과정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마도 거래를 하는 타이밍과 다른 한 편의 아량에 놀랄 수도 있다. 번영의 새로운 시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올해 북한은 오래된 악마와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몇 십 년만의 가장 혹독한 추위와 가뭄은 농작물 수확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망가뜨려버렸다. 4월의 로켓 발사 실패는 당혹감과 함께 미국으로부터의 식품 원조 및 국제사회로부터의 강력한 비난까지를 가져다 줬다.

또한 화폐개혁 후 고조된 인플레이션과 지속적인 에너지 위기는 김씨 왕조의 세대교체가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실제로 이러한 위기에 있는 김정은 부위원장을 도와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일까?

올해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을 다시 대통령 자리에 앉혔다. 그가 보수정치적으로 주변 독재 권력자들과 동맹관계를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국제무대에서 점차로 친구들을 잃어가고 있다.

러시아는 동아시아에 과거 냉전스타일의 정책을 다시 돌이키려 하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목적으로 하는 러시아의 빈 약속들은 북한의 자생을 위한 목적으로 핵무기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다.

동북아는 다시 강력한 제국에 지배를 받게 되는 커다란 지리학적 게임 극장이 돼가고 있다. 이것은 7천 5백만 한국인들을 평화와 화해가 없는 불안한 상태로 남아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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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the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here... Moscow Supports Kim Jon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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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21, 2012

6.25전쟁 기념일에 돌아보는 한반도의 슬픈 역사

(글/ Dr. Leonid Petrov 시드니대 교수; 번역/정리: 김혜선 기자)

6월 25일은 한국전쟁 (1950-1953)이 시작됐던 슬픈 날로,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통일을 위한 냉전과 갈등은 제3차 세계대전의 기미까지도 보이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6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한과 북한 사이에 평화조약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는 주변국들의 자국 방어 위한 key place?!

심지어는 다시 전쟁이 재개될 가능성까지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데 문제의 요점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있다. 중국, 일본, 러시아가 들어있는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 한국이 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는 항상 주변의 대륙들과 북태평양 사이의 섬들에서 이민자들의 이동, 무역의 통로, 그리고 문화적 파도를 전파하는 다리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한국은 고대의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문화적인 통로가 돼왔으며 13세기에는 동쪽으로 그 세력을 넓혀오던 몽고의 군사력 확장을 종결 짓게 한 장소가 됐다.

16세기에는 아시아를 향한 일본의 세력확장을 도왔던 스프링 보드 역할을 하게 됐고 그 후 19세기에는 궁극적으로 가장 뜨겁고 오래 지속되는 냉전의 프론티어가 됐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한반도 주변국가들의 정책결정자들과 전략자들은 한국을 잠재적인 적으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중요한 지역적 가치가 있는 key place로 여겼다.

그러한 이유로 주변국들과의 힘든 관계는 한국의 숙명이 됐다. 심지어는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정치적 사건들은 언제나 주변국들의 관심과 신속한 반응을 끌어왔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은 매우 풍부하고 극적인 정치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 왕조는 그들의 제국에 한국을 포함시키려 했지만 현대적인 측면에서 보안조약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했다. 대륙의 영향력을 일본열도에 확장하려면 먼저 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그리고 중국과 일본 사이의 샌드위치 

임진왜란 (1592년-1598년)은 아시아의 가장 큰 전쟁이었으며 국제적인 갈등과 미래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최초의 한국전쟁’이었다. 전쟁은 중국을 정복하고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야심 찬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무사 토요토미  히데요시에의해 시작됐고 불행히도 한국은 중국을 정복하기 위한 가장 빠른 통로가 됐다.

한국이 일본군의 통로를 거저 열어주지 않음으로써 히데요시는 한국을 약탈하고 괴롭히는 대상국으로 삼았다. 명나라는 한국과 손을 잡고 히데요시의 중국을 향한 행진을 차단했다.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대는 결국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밀어내기는 했지만 중국은 종종 한국에 그 보상을 요구해왔다.

계속되는 국내 개혁과 부진한 행정부는 제국주의의 국가들에게는 쉬운 목표물이 됐다. 청일전쟁(1894년-1895년)과 노일전쟁(1904년-1905년)을 시작하는 일본은 계속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전쟁들에서 일본은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한국은 이미 중국에 세력을 확장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던 일본에 외교적으로 통제능력을 잃었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은 일본제국 확장을 위해 경제적, 군사적으로 필요한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일본, 북한 인정하고 경제무역제재 해제해야 

한국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문화말살정책을 상대로 계속 투쟁했고 이후 35년동안 만주와 중국에서조차 일본군에 저항하는 투쟁은 계속됐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했다. 소련과 미국은 준비가 돼있지 않던 한국을 두 임시영역으로 나눠 맡게 되었다. 그때는 냉전으로 알려진 새로운 글로벌 갈등이 이미 진행 중에 있었으며 임시로 나뉘어졌던 한국은 끝내 통합되지 못했다.

두적대국가 – 대한민국 (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는 그렇게 1948년에 세워졌다. 그 후 소련과 미국이 한국을 떠난 즉시 새로운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됐다.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20개국의 연합군이 전쟁에 참여했고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북한, 중국, 유엔군 사령부 대표들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적절한 평화조약조차 없이 적절치 못한 휴전협정조약이 체결됐다.

일본과 한국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확고한 동맹관계가 돼 미국과 강력하게 손을 잡고 있다. 1990년 초반, 공산주의의 공식적인 붕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경제원조와 안보보장으로 북한은 유지돼오고 있었지만 그들은 한국과 외교와 무역관계를 설립했다.

이제는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인정하고 경제무역제재조치를 해제해야 할 시간이 됐다. 단단히 얽힌 동맹국의 낡은 시스템은 21세기를 다극화 세계로 만들고 한국을 영원한 분단상태로 가야 한다고 부추기고 있다. 한국이 그러한 동맹국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단단히 얽혀있던 낡은 시스템을 털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평화와 안정의 시대가 찾아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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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une 15, 2012

위화도. 황금평 경제개발이 주는 의미는?


(글/ Dr. Leonid Petrov 시드니대 교수; 번역/정리: 김혜선 기자)

지난 주 북한은 두 개의 섬 즉, 황금평과 위화도를 외국인들을 위한 ‘무비자 구역(Visa Free Zone)’으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 특별법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그들에게 관세, 세금 및 토지 사용을 하는데 특혜를 주는 것을 골자로 한다. 과연 이 법으로 북한은 가난으로부터 구제되고 경제적으로 더 발전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작년 6월 북한•중국 공동개발 시동 걸렸지만…

한국 역사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14세기 위화도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위화도 회군)를 기억할 것이다. 1388년 고려의 장군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해 명나라 땅인 랴오둥 반도를 침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군대가 압록강 하구에 있는 위화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고위 정부 관료와 군대의 지원을 받으며 이성계는 수도인 개성으로 돌아갈 것을 계획했고 쿠데타를 실행했다. 그는 왕위에 올랐고 이씨 조선을 세우며 태조가 됐다.

북한이 위화도와 황금평을 중국과의 미래 특별경제구역으로 정하고 북한의 경제발전을 도모하려 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된다면 아마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야기가 떠오를 것이다.

압록강 하구에 있는 이 섬들은 이성계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두 나라 사이의 자연적인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이 위치들은 북한 측에 있는 신의주 도시들과 중국 측의 단동에 있는 도시들과는 정반대 방향에 위치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

2011년 6월에 북한과 중국의 공동개발 및 운영 프로젝트에 시동이 걸렸다. 버려진 섬을 개발해 산업단지로 바꾸기 위한 결정은 경제원조와 투자를 권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던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위해 만들어졌다.

중국 허락 없는 국경지역 개발은 NO!

2011년 12월 그의 죽음 이후에 곧 바로 후계자가 된 김정은 부위원장은 북한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중국과 비즈니스를 해 가능한 한 많은 이윤을 현금으로 남기라”고 요구했다.

상업적 도시로서의 위화도와 황금평의 중요성은 북한의 경제계획의 핵심에 있었다. 라선(Rajin-Seonbong) 경제무역지대 공동개발과 협력 초기의 경험은 러시아나 일본, 그리고 한국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입장을 보일 경우 중국은 적극적으로 인프라와 제조업 분야에 투자할 참이었다.

중국은 신의주를 홍콩의 마카오처럼 개발하려는 신의주특별경제구역을 설정하려는 북한의 계획을 저지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국의 억만장자인 양빈을 2002년 신의주 특별행정구역 주지사로 임명했다.

같은 해에 북한 정부는 ‘7월 1일 경제조치’로 알려진 자체 회계관리를 기반으로 한 임금 및 가격 시스템에 대한 새로운 경제정책을 시행했다. 중국은 북동지역에 또 다른 홍콩을 세우려는 계획을 환영하지 않았으며 양빈을 탈세혐의로 잡아들였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중국과의 국경지역 개발은 모두 중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계속하고 있는 북한은 이로 인해 국제적인 제재와 국제시장에서의 신용을 제한 받게 됨으로써 중국 의존도가 점점 커지고 있다. 경제적으로 메마른 북한은 외국인 투자를 이용해 경제를 활성화시켜보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은 이미 라선 경제무역지대의 항만시설과 자동차도로 개발에 미화 3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 후 중국은 위화도와 황금평의 경제개발지역에 상당히 많은 자본을 투입하고 있다. 이런 투자들이 북한을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구출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서울-평양 평화공존•경제협력만이 살 길

중국이 북한에 중국식 개혁을 시작하기로 결정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북한 정치 체제의 붕괴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개혁’이란 단어는 북한에서의 ‘금기어’이기 때문이다. 북한 지도자는 북한의 경제를 개발하려 하고는 있지만 사회적이나 정치적으로 북한이 변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새로운 북한의 젊은 지도자는 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발전시킬 그 어떤 비전이나 계획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나이 많은 보수 세력과 보수적인 엘리트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는 북한에 어떠한 변화도 유발하지 않을 작은 특수경제지대를 설정해 외화를 벌어들이려 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으로 북한의 주민들은 잘 먹고 잘 입고 PC와 휴대폰을 가질 수는 있지만 지도자의 결정에 대한 공포와 종속성 같은 편집증 상태에서의 삶을 해야 할 것이다.

위화도와 황금평을 경제적으로 개발한다 해서 북한의 사고변화의 어떠한 징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경제적인 이익보다는 정권 유지에 드는 비용을 위해 북한은 마지 못해 이런 경제협력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과 평양 사이에서의 평화공존과 경제협력만이 북한의 이러한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풍부한 자원과 남한의 최첨단 기술은 서로 완벽한 보완관계에 있다.

남한의 경제적 협력은 북한을 경제적 위기에서 구출 해줄 가능성이 있다. 현재의경제협력은 북한을 장기적인 경제적 위기로 다시 돌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남한과의 경제협력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새로운 시장을 열고 유라시아대륙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남한의 파워하우스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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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une 8, 2012

한반도에서 펼쳐지는 사이버 전쟁?!

(글/ Dr. Leonid Petrov 북한연구가•시드니대 교수; 번역/정리: 김혜선기자

한반도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 핵무기 사용 가능성까지도 언급된 강력한 무력도발로 서울을 날려버리겠다는 협박과 함께 북한의 ‘거룩한 전쟁’이 한반도에 선포 됐다. 지난 주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GPS (Global Positioning System)를 북에 넘기려 한 혐의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 간첩 등)로 D무역 대표 이 모씨(74세)와 뉴질랜드 교민 김모씨(56세)를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북한 군대, 해킹전문지식 거의 완벽 구축

북한은 지난 달 2주 동안 남한 수도권지역 주요 공항을 대상으로 GPS교란시스템을 작동했다. 북한의 GPS교란장치는 GPS전파 수신을 못하도록 방해전파를 쏴 남한의 발달된 디지털사회와 네트워크를 방해하고 크루즈미사일 등 한국군의 정밀무기를 무력화 할 수 있는 장치이다. 당시 GPS 수신교란 때문에 국내외 항공기 6백 70여 대, 선박 1백 10여척의 운항이 지장을 받았다.

4월 13일 북한의 위성 발사는 불발로 끝났지만 북한은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남한을 위협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이버전쟁’을 이용하고 있다. 이 GPS교란신호는 DMZ (비무장지대)로부터 10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북한의 국경도시 개성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적됐으며 4월 28일에 시작해 5월 6일에 끝났다.

보도에 의하면 북한은 이번 사이버전쟁뿐만 아니라 북한의 군대가 해킹전문지식을 거의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12개월 동안 북한은 한국의 금융기관, 심지어는 미국정부와 미군의 웹사이트까지 수 차례 공격했다.

전문가들은 북한 인민군에는 수백 명의 해커들이 있으며 대부분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들 중 일부는 남한의 소셜네트워크에 침투해 북한의 선전을 확산하기 위한 심리전을 벌이고 있다. 북한 정찰총국은 한국의 IT산업과 네트워크 인프라를 다운 시키기 위해 그들을 조정하고 있다.

북한 정찰총국 게임프로그램 남한에 유통

요즘 북한은 사이버전쟁 중 하나로 컴퓨터게임 프로그램에 악성바이러스코드를 심어놓는 일을 하고 있다. 39세의 조씨로 알려진 한국 컴퓨터도매업자는 악성코드가 포함된 북한 정찰총국의 게임프로그램을 국내에 유통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중국에 가면 북한 사람들이 만든 게임을 싸게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심양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국내 가격의 1/3도 안 되는 가격으로 프로그램을 구입했고 악성코드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들여와 온오프라인 게임 운영자 수십 명에게 팔아 수억 원을 챙겼다.

악성코드에 감염된 PC 수십만 대는 북한의 디도스공격에 이용 될 수 있는 좀비 컴퓨터로 변했고 개인정보 50여만 건이 북한으로 넘어갔다. 북한은 실제적으로 이를 토대로 지난 해 4월 인천공항 서버해킹을 시도한 적이 있다.

지난 주 서울에서 체포된 56세의 뉴질랜드시민권자인 김씨는 지난 해 7월 중국 단동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 ‘한국의 첨단 방위산업 기술을 수집해 보고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김씨는 방위산업체 H사 관계자로부터 GPS 교란장치 기술을 이메일로 입수한 혐의가 있다. 이번에 체포된 김씨와 함께 체포된 그의 파트너 이씨는 1972년 간첩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뒤 90년 가석방으로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 출신이며 94년부터 대북교역을 해온 1세대 대북사업자이다.

남한 언론사에 ‘조준타격’ 가능성 시사

그러나 그들 외에 또 다른 조직이 NSI4.0 (장거리 위치추적 안테나) 기술도 입수하려 했다는 정황을 잡고 수사가 진행 중이다. 이 안테나는 2단 이상의 로켓에 장착되는 핵심장비이며 북한이 이 기술을 입수할 경우 지난 달 공개한 장거리 탄도미사일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009년 이 기술을 북한에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또한 남한의 검찰은 스텔스전투기 도료, 전파탐지 교란기, 해상작전 헬기시뮬레이터 등 군 기밀자료와 방위산업 기술들도 북한에 유출된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북한은 입수된 정보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지난 주에 명확히 보여줬다. 이례적으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북한은 또한 조선소년단 66돌 경축행사와 관련 남측 언론들이 이를 폄하하고 있다면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KBS, MBC, SBS, CBS 등의 좌표를 공개한 뒤 ‘조준타격’의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남한의 안보는 급성장한 정보통신기술의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1953년 한반도 상의 두 한국에 체결됐던 ‘평화협정’은 점점 더 도발적이며 팽팽한 긴장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두 나라 사이에서 공존의 평화를 유지하고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두 나라 사이의 좀 더 확고한 평화조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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